- 슬롯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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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15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낡은 스타렉스의 와이퍼가 ‘끄윽, 끄윽’ 하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앞유리에 들러붙은 눈을 힘겹게 밀어냈다. 그 뻑뻑한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 인생도 저렇게 억지로, 마지못해 닦여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박진수. 표정 좀 펴라. 누가 보면 도살장 끌려가는 소인 줄 알겠다.”
운전대를 잡은 민재가 혀를 차며 내 쪽을 흘깃거렸다. 나는 대꾸할 힘조차 없어 그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앙상한 겨울 나무들만 바라봤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서른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늙어 있었다. 깊게 패인 팔자주름, 며칠째 깎지 않은 수염, 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
지난달, 3년을 버티던 치킨집 폐업 신고를 했다. 보증금은 밀린 월세와 원상복구 비용으로 공중분해 됐고, 남은 건 빚 독촉장뿐이었다. 먹고살아 보겠다고 나간 인력 시장에서도 나는 환영받지 못했다. 어제는 “동작이 굼뜨다”며 욕을 퍼붓는 반장과 멱살잡이를 하고 현장을 뛰쳐나왔다.
내 주머니 속 핸드폰 뱅킹 앱에 찍힌 잔고는 32만 4천 원.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다.
“민재야. 나 진짜 돈 없어. 가서 그냥 구경만 할 거야. 커피나 마시고 올게.” “아이고,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냐? 그냥 바람 쐬러 가는 거라니까. 딱 5만 원. 5만 원만 바꿔서 기계 한 번 돌려봐. 밥값이나 벌면 다행이고, 잃으면 액땜했다 치면 되지.”
민재는 태평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 5만 원조차 아까웠다. 하지만 서울의 그 좁은 고시원 방구석에 처박혀 숨만 쉬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따라나선 길이었다.
한참을 달려 산길을 굽이돌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뜬금없이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강원랜드. 산중턱에 홀로 우뚝 솟은 그 건물은 주변의 황량한 태백산맥과 이질적으로 섞이며 비현실적인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입구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객장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부터가 확연히 달라졌다. 바깥의 차갑고 상쾌한 겨울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수천 명의 사람이 내뿜는 열기, 땀 냄새, 향수 냄새, 그리고 돈 냄새가 뒤섞인 비릿하고 묵직한 공기가 폐부로 훅 끼쳐왔다.
“와... 사람 봐라.”
평일 밤인데도 객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번들거렸다.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흥분된 눈동자들. 여기저기서 기계들이 토해내는 전자음과 칩 부딪히는 소리가 거대한 소음의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그 에너지는 역겨우면서도 동시에 압도적이었다.
민재는 익숙하게 테이블 게임 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멍하니 슬롯머신 구역을 배회했다. 화려한 그래픽이 번쩍이는 최신 기계들 사이,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기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5만 원권 한 장을 꺼냈다. 땀에 젖어 눅눅해진 지폐. 치킨집 문을 닫던 날, 마지막 손님이 내게 건넸던 돈이었다.
‘어차피... 이 돈 있어봤자 인생 안 바뀐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폐 투입구에 돈을 밀어 넣었다. 기계가 돈을 ‘스르륵’ 삼키는 소리가 묘하게 식욕을 자극했다. 버튼을 눌렀다.
르르륵, 르르륵.
릴이 돌아갔다. 아무 생각 없이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돈이 녹아 없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잔액이 2천 원 남았을 때였다. 나는 하품을 하며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의미 없이 돌아가던 그림들이 ‘턱’ 하고 멈췄다. 그리고.
빠바밤-! 띠리리리링!
갑자기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을 쳐다봤다. 기계 화면의 숫자가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100,000... 200,000... 300,000.
“어...?”
단 10분이었다. 아니, 5분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벽돌을 날라야 겨우 손에 쥐던 일당의 두 배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니 굴러들어 왔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현실인가?
돈을 현금으로 바꿔 주차장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지만 춥지 않았다. 주머니 속, 빳빳한 30만 원 지폐 다발의 온기가 허벅지를 찔러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뜨거웠다.
민재는 돈을 잃었는지 투덜거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나는 그 옆에서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고양감. 꽉 막혀 있던 혈관이 뚫리는 기분.
‘이게... 운이라는 건가? 아니면, 신이 내게 준 마지막 기회인가?’
그날 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들지 못했다. 내 인생을 바꿀 열쇠를 찾은 것만 같았다.
